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윌리엄 베버리지라는 이름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한 명이 전시내각을 이끌던 처칠 수상 앞으로 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의 제목은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 영국노동조합총연맹의 건의로 만들어진 이 보고서는 결핍, 질병, 무지, 불결, 나태함을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5대 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퇴치하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해야 함을 주요 가치로 내걸었다. 이 보고서는 발행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전 국민의 95% 이상이 그 내용을 접하게 될 정도로 큰 명성을 얻었으며, 당시 수상이던 처칠은 연설을 통해 전쟁 후 새로 수립되는 정부에서 베버리지 보고서에 입각한, '요람부터 무덤까지 아우르는 복지 정책을 실현'할 것을 천명했다. 베버리지 보고서의 노선에 따라, 처칠 재임 중 학교 급식과 공공 주택 보급 사업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고, 처칠의 뒤를 이은 노동당의 애틀리 내각은 가족수당제도와 국영보험제도, 토지 임대 통제법 등 여러 사회보장제도를 입안해 영국을 유럽의 대표적인 복지 강국으로 탈바꿈시켰다. 오늘날 영국이 자랑하는 국영의료보험 NHS는 이 시기에 확립된 것이다.

 

마가렛 대처 이후 영국의 복지체제는 과거보다 그 명성이 많이 바라긴 했지만, 오늘날 영국 복지사회의 발전 과정에는 보수주의 정당인 <영국 보수당>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세기 중후반 보수당 소속 수상이었던 디즈레일리는 노동자 주거 개선법, 공중보건법 등을 제정해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 앞장섰으며, 1867년에는 선거법 개정을 통해 다수 도시 근로자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했다. 2차 대전 이후 집권한 맥밀런 수상은 고아 연금과 노령 연금 지급을 확대했고, 주당 근로시간을 48시간에서 42시간으로 축소하는 등 전후 영국의 부흥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대처의 신자유주의 이전까지, 영국 보수당은 영국을 유럽의 대표적인 사회 강국으로 이끈 수권 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보수(保守)란 오래된 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철학으로써의 보수주의는 '수구'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정치철학에서의 보수주의는 전통과 관습을 지지하되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사회를 완전체에 가깝게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는 역사 속에서 형성된 구체적인 제도와 관습을 유지하되, 자유로운 민주사회를 향해 점진적인 개혁을 하는 것을 보수주의의 가치로 내건 바 있다. 보수주의의 원래 가치는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발전해 나가는 점진적인 변혁 과정을 지지하는 것이다.

 

최근 미래통합당의 내분이 심상치 않다. 기존의 아스팔트 우파 - 수구주의에서 탈피해 보수주의의 새로운 가치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보수주의를 내거는 이들의 주장도 가만 살펴보면 사회복지나 부의 재분배에 대해선 부정적인 시각이 다분하다. 헌법의 임정 법통이나 남북평화통일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견해를 비춘다. 통합당이 당사에 초상화까지 걸어가며 당의 원류로 존경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의료보험제도와 토지공개념 제도의 도입을 논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바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의료보험을 전 국민에게로 확대하고 영구임대주택사업을 실시하는가 하면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방 정책을 실시해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법통으로 선언하고 영화와 음악에 대한 사전심의제를 폐지하는 등 개방된 문화산업의 문을 열었다. 통합당이 보수주의의 가치를 내세운다면, 한국판 처칠, 맥밀런, 디즈레일리를 찾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Posted by 일간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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