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는 임정의 대표적인 좌파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18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고, 연해주의 알렉산드리아 김에 이은 두 번째 한인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이후 이동휘는 소련과 연계해 공산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확장하려 했고, 레닌이 이끌던 코민테른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독립운동에 활용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당시 한인 공산주의 단체의 분파는 러시아 이르쿠츠크의 <전러한인공산당>과 임시정부 이동휘 계열 <한인사회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인사회당이 코민테른에 가입을 선언하고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이르쿠츠크에 대표단 박진순을 파견했을 때, 전러한인공산당이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워 한인사회당의 자금을 탈취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한인 좌파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그 악명 높은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이다. 당시 총리 이동휘는 "공산주의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코민테른에 서한을 보내 한국 유일의 사회주의 정당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성립된 한인사회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해 소련 레닌에게서 금화 200만 루블을 지원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한형권과 김립이 레닌의 자금 중 일부를 한인사회당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해버린 것이다. 임시정부로 와야 할 자금이 이동휘의 정당 활동에 유용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임정 내에서 이들에 대한 성토가 터져 나왔다. 예관 신규식, 이동녕 등 여러 임정 지도자들은 이들의 행위를 '죽어 마땅한 처사'로 비판했고, 그 결과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만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두고 발생한 두 사태는 임정의 대외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좌우대립은 임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어 사실상 '종이 정부'의 위치로까지 추락시켰다. 임시정부가 다시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기구로 그 명맥을 회복한 것은 백범 김구가 영수로 추대되고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 계열이 임시의정원에 합류한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최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기림 사업을 전개해 온 정의기억연대의 부실 회계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민족의 비극이라는 금기를 내세워 기부금 사용을 투명하지 않게 처리했다는 점,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표하는 조직임을 내세우며 독단적인 행보를 펼친 윤미향 씨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많은 사람에게 당혹감을 안겨다주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세계에 알리며 역사의 비극을 후대에 전승하고 세계인의 동참을 이끌어내는 데 정의연이 적극적으로 활동해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과 교육, 인권 증진 사업에 사용돼야 할 기부금이 정의연 회장 윤미향 씨에 의해 불투명하게 사용된 것은 민족 독립이란 대의를 위해 쓰여야 할 독립 자금을 한인사회당이 독단적으로 사용처를 결정한 100여 년 전 모습을 연상케 한다. 정의기억연대는 기부금 사용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윤미향 1인 운영 체제의 폐쇄적 조직 체계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개방된 위안부 단체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한인사회당의 불투명한 자금 사용 논란이 임시정부를 위기에 몰아넣고, 급기야 독립운동세력의 몰락에 준하는 사태를 불러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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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어록2020. 5. 6. 16:42

오늘은 삼일절이다. 기쁜 날이다. 3·1운동 100주년이다. 매년 맞이하는 우리 민족의 성스러운 축일(祝日)이다. 3월 1일이 매년 경사스러운 이유는 100년 전, 온 민족이 일치단결한 그 날로 말미암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기 때문이다.불행히도 대략 3·1운동을 기점으로 우리는 오른쪽과 왼쪽,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좌파와 우파는 서로 갈등하면서도 각자 줄기차게 일본 제국주의와 투쟁했다. 결국 우리 민족은 벅찬 가슴으로 광복을 맞이했다.

 

삼일절이 광복절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남북이 다시 하나 된, 통일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을 8월 15일이 아니라, 1919년 3월 1일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3·1운동은 대한민국 건국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년 전 함성의 그날은 우리의 뇌리에서 가물가물한 날이기도 하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다.

 

3.1절은 대한민국의 경사스러운 날, 한국 건국기념일이다 

 

집단 무의식 속으로 침잠한 삼일절을 의식의 세계로 다시 불러올리기 위해, 그리고 3·1운동이 우리 민족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위해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과 미래융합연구원 인간평화와 치유연구센터가 25, 26일 양일에 걸쳐 ‘민주공화 100년, 세계시민 100년: 보편평화를 향하여’를 주제로 3·1운동 100주년 특별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했다.

 

 

3·1운동과 미국혁명을 같은 역사적 연장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3·1운동을 미국혁명과 연계했다. 이승만과 서재필은 제1차 한인대회(1919년 4월 19일)의 장소로 필라델피아를 선택했다. 미국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인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한인대회 참가자들은 대륙회의와 제헌회의가 열렸던 미국 독립기념관으로 행진했다. 이승만은 독립기념관에 있는, 조지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은 매우 유명하다.”

 

 

미국혁명에 가담한 미국인들은 총을 들었다. 3·1운동은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왜 그런 차이가 났는가.

 

“상황이 달랐다. 일본의 한국 지배가 영국의 미국 지배보다 훨씬 엄혹했다. 미국 주둔 영국군은 그 숫자가 많지 않았고 서로 떨어져 있었다. 한국인들은 무기를 확보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적인 시위는 선택의 산물이자 동시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천도교·개신교·불교 지도자들의 합작이 3·1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세속화에 따라 3·1운동의 종교적 성격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3·1운동의 전체적인 성격이 종교적은 아니더라도, 3·1운동에 등장한 많은 수사(rhetoric)은 종교적이었다. 특히 미국 내 상당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그들의 활동이 ‘크리스천 프로젝트(Christian project)’라고 명시적으로 밝혔다. 그들은 한국의 기독교와 일본의 ‘이교(異敎· paganism)’를 대비시키며 미국인들에게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했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와 개혁·근대화 운동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출처 : 중앙일보 <김환영의 직격인터뷰> 20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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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어록2020. 4. 29. 03:19

정통성 외면하면 「민주 목표」 달성 못해

 

주체성에는 개인의 자아를 바탕으로

 

3·1- 4·19정신으로 되돌아가 소외감 없는 「자유 있는 복지 국가」 로 키워야

 

 

중국 땅서의 태극기 게양

 

일제하 중국 땅에서 몇몇 한국인들이 아침마다 국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그 청년들이 있던 곳은 중국군의 사관학교구 내였기 때문에 진짜 태극기를 게양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태극기를 게양하는 시늉을 하면서 조국애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태극기를 게양하던 한국인 청년들의 모습을 그려보면 가슴 뿌듯해옴을 느낀다. 나라를 잃고 중국 대륙을 방황하던 우리 청년들의 망국의 설움이 그토록 크고 가슴 저린 것이었기에 나라를 다시 찾고 싶은 열망은 생명보다도더 귀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우리 민족이 근대적 조국을 가지게 된 것은 3·1독립운동에서부터 그 발단을 찾아볼수 있다. 당시 2천만의 전민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을 때 우리 민족 모든 사람의 가슴마다에 새 조국이 잉태된 것이다. 곧이어 해외에서는 국내의 3·1운동에 자극되어 그 새로운 민족국가건설의 의지로서의「대한의 독립」을 바탕삼아 상해 임시정부등 민주공화국형의 새 조국이 탄생된 것이다.

 

 

유럽에서도 「네이션」으로서의 조국(Patrie)은 프랑스 혁명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한 국가의 통치권원이 그나라의 「네이션」 즉 국민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주권재민을 규정한 헌정질서 아래서만이 근대적 국민이 성립되고 그들이 떳떳한 소속감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은 「백성의 나라」 「국민의 나라」로서의 민주공화국이 아니면 안된다. 모든 시민이 동일한 법에 의해 보호되고, 동일한 이해에 의해 통합되고, 다같이 인간의 기본권을 누릴수있는 정치적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의 「조국」이라는 점에서 근대적 민주헌정의 성립이 없이는 조국도 조국애도 있을 수 없게 되는것이다.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과정에서 크게 두가지의 조국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절대왕정에서 보는 절대주의 국가이고, 여기서는 충군애국형의 군주애, 또는 국가애만이 강요된다. 또 하나는 주권재민의 민주헌정을 본질로 하는 「내나라 의식」에서 생기는 새 조국이 있게 된다.개화 이후 우리 민족은 주로 대한제국 말부터 근대적 국가관의 형성에 힘썼다.

 

 

민족성 당위 조직적 음모

 

어떤 이는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들어 국란을 미리 방비할 수 있는 계책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빈약한 국력으로 큰 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병력을 양성했다 하더라도 그 병사들이 임금과 지배층을 위해 얼마나 열렬하게 목숨 바쳐 싸워주었을는지는 의문이다.

 

3·1운동 이후에도 만주 독립군속에는 왕조를 다시 찾아 왕정복고를 해야한다는 복벽파와 공화국형의 임정에 충성하자는 민국파가 대립되어 있었다. 의병계의 대한광복단은 그 취지서에서 군주의 원수를 갚고 군주국으로서의 대한제국의 복국을 주장했을 뿐만아니라 「상강대륜(常綱大倫)의 광복」이라 해서 주자학적 예교질서의 회복을 내세웠다.

 

이와반대로 임정계의 간도대한민국회(間島大韓民國會)측은 민국파로서 그 모병 「고유문(告諭文)」에서「임시정부 외에서는 피복벽주의단체(彼復辟主義團體)의 군인이 되어 죽는다면 하등의 가치도 없고 하등의 성공도 없다. 가치있고 성공있게 죽으려면 공화정부의 군적에 등록하고 공화정부의 군인이 되라」고 호소했다.

 

 

이처럼 3·1운동을 고비로 해서 우리 민족의 조국관은 왕국에서 민국으로 소수 지배계급의 나라에서 민국의 나라, 민족국가에로 옮아가게 된다. 8·15 해방후 비록 분단 상황에서나마 새로 탄생된 대한민국은 3·1독립정신과 그 민주공화국형의 새 조국관을 실현시킨 것이었고, 4·19혁명을 통해 반독재, 민주의 새 나라상이 거족적인 함성 속에 선명하게 부각된 것이다.

 

우리는 새 시대의 한국인이 가져야 할 새로운 조국관을 찾기위해서는 이처럼 3·1독립정신과 4·19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민족사적 정통성을 외면하거나 벗어나 부국강병의 나라, 경제대국의 비전을 내걸어도 그것이 민주적으로 합의된 국가목표가 못되고 하향적인 공보(公報)목표일 때 어떻게 그것을 바람직한 조국의 상이라고 할수있겠는가.

 

일제 식민지 당국이 한민족에게 가한 가장 큰 죄악은 우리의 민족성을 왜곡하여 조직적으로 음모한 점이다.지금까지도 뿌리 깊이 남아 있는 사대주의적 성격론은 한민족의 근성이 사대적인것처럼 조작했고, 따라서 일제와 같은 침략자의 지배를 받거나 추종할 운명에 있는듯이 유도하려고 했다. 식민지 당국은 우리 민족이 단결심이 약한 민족이라고 조작, 선전하는 한편으로 수많은 항일결사를 적발해서 투옥, 파괴했다.

 

 

1980년 3월 8일 <朝鮮日報>

 

우리의 바람직한 모습은 어떠해야 하나 - 새 시대의 한국인

2. 새로운 조국관 中

 

신일철(申一澈) 고려대 교수

출처 : 조선일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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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어록2020. 4. 18. 22:48

반만년 동안 여러 임금들께서 피땀을 흘려가며 지키고 보전한 금수강산을 강한 이웃나라의 침탈을 받아 빼앗긴 것이 마치 비둘기가 까치의 둥지를 차지한 꼴이 되어 버렸다. 반만년 동안 그 할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비호와 사랑스런 보살핌이 이어져 대가 내려갈수록 번성했던 신성한 후손들이 남에게 무참하게 짓밟히고 결국에는 주인의 자리까지 빼앗기는 수치를 겪게 되었다.

아! 슬프도다. 우리들은 충성스럽지 못한 백성이 되어 버렸고 온당치 못한 자식이 되어 버렸다. 무슨 생각으로 천지신명께서 감응하여 나타나시기를 바랄 것이며, 무슨 낯짝으로 지하에 계시는 돌아가신 조선 사람들의 영혼을 뵐 것이며, 무슨 염치로 여러 독립국의 자유민들을 대할 것인가?

 

다행히 옥황상제께서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시고 오랜 옛날부터의 조상의 영혼들이 저승에서 도와주시어 드디어 광복의 운세와 부활의 기회가 찾아왔다. 부끄러움을 머금고 욕됨을 참으며 10년 동안 마음 속에 칼을 갈아온 우리 이천만 동포는 우리들의 자유와 우리 민족의 정신을 세계에 통쾌하게 선포하고 있는 큰 소리로 부르짖어 세계의 눈과 귀를 놀라게 했다.

우리들의 행동이 문명적이고 정의로왔기 때문에 세계 여론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일찍이 없었던 문명적인 싸움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완고하고 사나우며 도의라고는 모르는 저 적들은 도리어 우리 정의의 군대를 폭도라고 하면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 우리 형제자매 가운데 사상자가 만여 명이나 되고 철창 속에서 해를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또한 얼마인가? 무릇 자유의 대가는 이렇게 무거운 것이다.

우리들은 세계에 대해서 조국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면해 보려고 한다. 비록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지만, 사랑하는 우리 동포여! 유린되었던 강토를 회복한 이 날, 천만년 기념해야 할 이 날, 우리 형제는 이 날을 경축하면서 우리의 의로운 용기를 다시 발휘할지어다.

실행규약

1. 남녀 학생의 휴교는 물론 우리 동포는 일제히 자유롭게 만세를 외칠 것

1.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을 것.

대한민국 2년 3월 1일

대한민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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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어느 방송사도 중계하지 않은 씁쓸한 분위기 속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기념식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기공식이 서대문독립공원에서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에게 '자유와 평등', '화합과 단결', 그리고 '인류애'를 가져다 주었으며, 친일이 아닌 독립운동이 대한민국 역사의 주류였음을 모두가 알 수 있게 할 것임을 선언했다.

 

문 대통령의 축사에서처럼, 임시정부는 반일독립을 넘어 자유평등, 총화단결, 인류공영의 가치를 추구한 민주공화국의 뿌리이자 법통이었다. 임시정부에 의해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대내외에 천명된 지 어느새 101년, 독립과 산업화, 민주화의 100년사를 마감하고 이제 새로운 조국의 2세기로 나가는 도상에서, 우리는 새 시대를 개척할 첫걸음으로 총선거를 하게 된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임시정부의 정신과 가치는 단순히 독립건국이 제일(第一)의 과제였던 대일항쟁기를 넘어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사료된다. 임시정부의 국시였던 삼균주의는 개인과 개인의 평등, 민족과 민족의 평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추구하며 세계 여러 나라가 함께 어울려 사는 '세계일가'(世界一家)를 지향했다. 참정권을 폭넓게 보장하여 정치적으로 균등을 실현하고,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의 통제, 중소산업의 민영화로 경제적 기회의 균등을 이루고, 국비 교육을 통해 누구나가 배움으로써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코로나19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고, 신자유주의의 광란 속에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고 부(富)에 따른 신 계급제가 등장한 오늘날의 사회에서, 임정 선열들이 내세운 인류공생의 가치와 만민평등의 정신은 더욱 절실한 '오래된 미래'다.

 

 

친일이 아닌 독립운동이 대한민국의 주류라는 구절은 새 시대의 국회가 받들어야 할 국가의 정체성을 넌지시 던져주고 있다. 지난 건국 101년의 역사는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헌법과 정부를 수립하고, 국민의 역량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빛의 역사였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이다.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헌법은 반민특위의 해체와 부일배(附日輩)의 집권으로 더럽혀졌고, 군사독재 하에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은 억압받았으며, 신자유주의의 도입으로 빈부격차는 날로 심각해지고 청년은 절망과 무의욕 속에 경제 계급제에 물들어갔다. 임시정부가 지향했던 가치와는 정반대로 나갔던 지난 날의 모습은 국가정체성의 위기 그 자체였다. 이번 총선거가 국체(国体) 수호의 선거인 이유다.

 

이번 총선거는 임시정부가 그린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구현할 일꾼을 선출하는 축제의 장이어야 한다. 독립운동가들이 제시한 자유평등과 평화번영이라는 국체의 가치를 수호할 것인가, 아니면 친일·군사독재 세력의 반국가(反国家) 이념을 확산시키고 조국의 뿌리를 뒤엎을 것인가. 코로나19 속 흔들림 없는 방역과 민주주의의 수호로 세계를 이끄는 선두가 된 대한민국이 나갈 길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현명한 애국 국민들은 정로(正路)를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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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어록2020. 4. 12. 21:31

 

삼일절의 경축은 예년과 같은 정도의 무드 속에서 치러졌다. 근래의 예년이라는 것이 경원(敬遠)의 그것이어서, 일반 민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관공서나 은행 같은 데서도 버젓하게 국기를 달지 않아도 좋은 그런 무드이다. 그 흔하던 아치 하나 마련하지 않았다 해서 시민들이 비난한 데 대해서 당국은 그런 예산이 없다고 하기도 하고, 아치는 외국 원수를 환영할 때만 세우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말한 당국도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것이라면 그 임시정부를 낳게 한 3.1운동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무를 가져온 씨라고 할 것이다. 혹 3.1운동이 없어도 독립해서 주권국가를 가질 수 있었다 해도 현실적으로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있는 대한민국은 3.1운동을 씨로 한 나라다. 외국원수 수사명이 한꺼번에 내방하는 날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삼일절이다. 그런데 그 삼일절은 점점 서자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로 하여금 3.1운동을 갖게 한 그 일본은 지난해를 <명치 100년>이라고 해서 크게 떠들썩하게 경축했다. 그들이 그렇게 찬미하고 경축한 명치 100년 속에는 한국 병탄도 들어있다. 설마 그 명치 100년의 눈치를 보느라고 3.1운동 50년을 허술하게 대접하기로 한 것으로는 보고 싶지 않지만, 상대방인 일본은 예년과 같은 정도의 삼일절 50주년을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선인정신(善人精神)의 발휘로 볼 것인가, 비굴한 구걸로 볼 것인가.

 

일본이야 어떻게 보든 더 큰 문제는 우리 국민의 감회가 어떠한가에 있을 것 같다. 도하의 각 신문에 대대적으로 장식된 3.1운동 50년과 위정당국이 치러준 3.1절 50주년 사이에 있는 너무나 큰 공백을 보고 국민은 일종의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좌절감은 자칫하면 저항 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쉬워서, 오히려 잠자려 하던 반일정신을 자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삼일절의 경축이 아니고 3.1운동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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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1주년 되는 날이었다. 봄바람이 이는 춘4월 아침, 코로나19로 인해 예년과는 달리 소수의 인원만이 참석한 가운데 서대문독립공원에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친일이 아닌 독립운동이 역사의 주역"임을 강조하였고, 임시정부 기념관 설립의 당위는 임정 독립운동가들이 지향한 '자유 평등', '통합', 그리고 '인류애'의 가치를 후대에 널리 알리기 위함임을 선언했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오늘날 사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던져주었다. 그의 말대로, 임시정부의 목적은 단순히 반일 독립이 아니었다. 인간의 존엄을 본질로 하는 자유와 평등, 성별, 나이, 빈부, 지역을 넘어선 국민의 화합과 통합, 인류 문명에 공헌하는 인류애의 회복, 그것이 바로 임시정부가 지닌 역사적 의의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시작이다. 3.1운동의 민의를 받들어 임시정부를 수립한 애국지사들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선포하고 삼권분립의 민주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 임정은 여러 고난 속에서도 임시헌법과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따른 정당 정치를 수행했고, 이는 우리 민주주의의 큰 자산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헌장과 강령은 1948년 제헌 헌법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오늘날 민주 헌정의 기원이 되었다. 헌법 전문의 3.1운동과 임시정부 법통은 민족사관을 넘어 민주사관까지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임정의 의의는 독립과 정부수립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3.1혁명 정신 해석>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3.1운동의 핵심 정신을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는 한민족의 독립과 전 인류의 공동생존을 위한"자존과 공존"이요, 둘째는 계급과 당파를 넘어선 "민주와 단결"이요, 셋째는 권세에 굴하지 않고 가난에 무너지지 않는 "기개와 도의"며, 넷째는 대단결을 위한 "자신감"이었다. 김구 선생이 말씀하신 3.1운동의 정신은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이기도 했다. 임정의 국시였던 삼균주의는 최종 목표를 세계 여러 민족이 함께 사는 "세계일가"였으며, 정치적 기회의 평등과 개인과 개인 간의 차별 폐지를 주장했다.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누구나가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세상 또한 임시정부가 그리는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공정하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 세계 인류와 더불어 사는 세상,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목적은 실로 이것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니다. 임정의 역사는 자유와 민권, 평화를 위한 겨레의 역사요, 즉, 대한민국이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길잡이다. 인류의 역사가 자유와 인권의 확대라는 진보의 역사인 이상, 우리나라의 최종 목표가 남북이 하나 되는 진정한 통일민주공화국의 건설인 이상, 임시정부는 이전부터 그래왔고 오늘날에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만대에 지속될 조국의 오래된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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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어록2020. 4. 10. 14:27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우리 국민들은 이렇게 노래 불렀다.

 

① 자유민아 소리쳐서 만세 불러라 임시정부 만세 불러라 대통령, 국무총리, 각부 처장과 국제연맹 여러 특사 만세 불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세 / ②우리 이미 이민족의 노예 아니오 또한 전제 정치 하의 백성 아니라 독립국 민주정치 자유민이니 동포여 소리 쳐서 만세 불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세.

 

 

1919년 4월 13일임시 의정원의장 이동녕과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의 이름으로 선포된 상해 임시정부 의원내각제 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 이었다.그후 서울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집정관 총재로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혼돈이 생겼다. 안창호가 미국에서 상해에 도착, 러시아령 정부와 함께3개 임시정부를 통합하고 상해 임정헌법 제1차 개헌을 통하여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로 하는 정부를 9월11일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런 축하의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그 당시의 민주화 열기를 알 수 있다.

 

광복이 되자 이런 노래도 나왔다.

 

따다따 따다따 나팔 소리 들린다 / 쿵 쿵 쿵 북소리 들린다 / 남대문을 열어라 동대문을 열어라 / 임시정부들어온다 광복군이 들어온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들어오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해체되고 정부 요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왔다. 이승만은 국부로 떠받드는 국민의 지지와 미국과의 연계를 맺으며 정부를 수립,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은 통합 임정의 대통령이었으나 그의 독단독선적인 성격에다 그가조직한 구미위원부의 권한 문제와 공채 발행 문제로1925년 「탄핵결의」 를받았다. 그리고 임정은 제2차 개헌을 통해 완전한 내각책임제로 바꿨다. 이승만의 「임정」 계승은 말 뿐이었다. 4·19 민주 학생혁명으로 이승만 권위주의 체제는 무너졌다. 여기서 우리는 정부의 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우리는 임정을 「제1민주정부」 로명명하여 「제1공화국」 과혼동을 피하고 「제1공화국」 은 이승만 정부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들리고 남대문도 동대문도 열었지만 광복군은 들어오지 못했다. 그리고 국군의 주류는 일군(日軍) 만군(滿軍) 출신으로 형성되었다. 비대해진 군은 정치에 나섰다. 5·16쿠데타에 성공하고 정권을 잡았다.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 권위주의 체제는 또 군 출신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장기집권과 독재정치를 한 정부를 민주공화국이라고 할 수없다. 이제 4·19 후의 민주당 정부를 「제2」, 시민혁명적 6월 항쟁을 통해 국민의 손으로 이룩한 현 정부를 「제3민주정부」 라고 정리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민족사관은 있어도 이러한 민주사관은없다. 헌법의 전문대로 「3·1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 하는 민주정치사의 맥을 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임정을 「제1민주정부」 로 명확히 함으로써 민주화는 굳게 다져진다고 본다.

 

 

臨政은 「제1 민주정부」

임시정부 수립 75주년에 부쳐

民主史觀 정립‥‥「정부의 脈」 정리 필요

 

李達淳

 

1994.04.12. 조선일보

 

Posted by 일간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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