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어록2020. 4. 29. 03:19

정통성 외면하면 「민주 목표」 달성 못해

 

주체성에는 개인의 자아를 바탕으로

 

3·1- 4·19정신으로 되돌아가 소외감 없는 「자유 있는 복지 국가」 로 키워야

 

 

중국 땅서의 태극기 게양

 

일제하 중국 땅에서 몇몇 한국인들이 아침마다 국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그 청년들이 있던 곳은 중국군의 사관학교구 내였기 때문에 진짜 태극기를 게양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태극기를 게양하는 시늉을 하면서 조국애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태극기를 게양하던 한국인 청년들의 모습을 그려보면 가슴 뿌듯해옴을 느낀다. 나라를 잃고 중국 대륙을 방황하던 우리 청년들의 망국의 설움이 그토록 크고 가슴 저린 것이었기에 나라를 다시 찾고 싶은 열망은 생명보다도더 귀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우리 민족이 근대적 조국을 가지게 된 것은 3·1독립운동에서부터 그 발단을 찾아볼수 있다. 당시 2천만의 전민족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을 때 우리 민족 모든 사람의 가슴마다에 새 조국이 잉태된 것이다. 곧이어 해외에서는 국내의 3·1운동에 자극되어 그 새로운 민족국가건설의 의지로서의「대한의 독립」을 바탕삼아 상해 임시정부등 민주공화국형의 새 조국이 탄생된 것이다.

 

 

유럽에서도 「네이션」으로서의 조국(Patrie)은 프랑스 혁명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한 국가의 통치권원이 그나라의 「네이션」 즉 국민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주권재민을 규정한 헌정질서 아래서만이 근대적 국민이 성립되고 그들이 떳떳한 소속감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은 「백성의 나라」 「국민의 나라」로서의 민주공화국이 아니면 안된다. 모든 시민이 동일한 법에 의해 보호되고, 동일한 이해에 의해 통합되고, 다같이 인간의 기본권을 누릴수있는 정치적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의 「조국」이라는 점에서 근대적 민주헌정의 성립이 없이는 조국도 조국애도 있을 수 없게 되는것이다.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과정에서 크게 두가지의 조국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절대왕정에서 보는 절대주의 국가이고, 여기서는 충군애국형의 군주애, 또는 국가애만이 강요된다. 또 하나는 주권재민의 민주헌정을 본질로 하는 「내나라 의식」에서 생기는 새 조국이 있게 된다.개화 이후 우리 민족은 주로 대한제국 말부터 근대적 국가관의 형성에 힘썼다.

 

 

민족성 당위 조직적 음모

 

어떤 이는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들어 국란을 미리 방비할 수 있는 계책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빈약한 국력으로 큰 규모의 상비군을 유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병력을 양성했다 하더라도 그 병사들이 임금과 지배층을 위해 얼마나 열렬하게 목숨 바쳐 싸워주었을는지는 의문이다.

 

3·1운동 이후에도 만주 독립군속에는 왕조를 다시 찾아 왕정복고를 해야한다는 복벽파와 공화국형의 임정에 충성하자는 민국파가 대립되어 있었다. 의병계의 대한광복단은 그 취지서에서 군주의 원수를 갚고 군주국으로서의 대한제국의 복국을 주장했을 뿐만아니라 「상강대륜(常綱大倫)의 광복」이라 해서 주자학적 예교질서의 회복을 내세웠다.

 

이와반대로 임정계의 간도대한민국회(間島大韓民國會)측은 민국파로서 그 모병 「고유문(告諭文)」에서「임시정부 외에서는 피복벽주의단체(彼復辟主義團體)의 군인이 되어 죽는다면 하등의 가치도 없고 하등의 성공도 없다. 가치있고 성공있게 죽으려면 공화정부의 군적에 등록하고 공화정부의 군인이 되라」고 호소했다.

 

 

이처럼 3·1운동을 고비로 해서 우리 민족의 조국관은 왕국에서 민국으로 소수 지배계급의 나라에서 민국의 나라, 민족국가에로 옮아가게 된다. 8·15 해방후 비록 분단 상황에서나마 새로 탄생된 대한민국은 3·1독립정신과 그 민주공화국형의 새 조국관을 실현시킨 것이었고, 4·19혁명을 통해 반독재, 민주의 새 나라상이 거족적인 함성 속에 선명하게 부각된 것이다.

 

우리는 새 시대의 한국인이 가져야 할 새로운 조국관을 찾기위해서는 이처럼 3·1독립정신과 4·19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민족사적 정통성을 외면하거나 벗어나 부국강병의 나라, 경제대국의 비전을 내걸어도 그것이 민주적으로 합의된 국가목표가 못되고 하향적인 공보(公報)목표일 때 어떻게 그것을 바람직한 조국의 상이라고 할수있겠는가.

 

일제 식민지 당국이 한민족에게 가한 가장 큰 죄악은 우리의 민족성을 왜곡하여 조직적으로 음모한 점이다.지금까지도 뿌리 깊이 남아 있는 사대주의적 성격론은 한민족의 근성이 사대적인것처럼 조작했고, 따라서 일제와 같은 침략자의 지배를 받거나 추종할 운명에 있는듯이 유도하려고 했다. 식민지 당국은 우리 민족이 단결심이 약한 민족이라고 조작, 선전하는 한편으로 수많은 항일결사를 적발해서 투옥, 파괴했다.

 

 

1980년 3월 8일 <朝鮮日報>

 

우리의 바람직한 모습은 어떠해야 하나 - 새 시대의 한국인

2. 새로운 조국관 中

 

신일철(申一澈) 고려대 교수

출처 : 조선일보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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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어록2020. 4. 10. 14:27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우리 국민들은 이렇게 노래 불렀다.

 

① 자유민아 소리쳐서 만세 불러라 임시정부 만세 불러라 대통령, 국무총리, 각부 처장과 국제연맹 여러 특사 만세 불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세 / ②우리 이미 이민족의 노예 아니오 또한 전제 정치 하의 백성 아니라 독립국 민주정치 자유민이니 동포여 소리 쳐서 만세 불러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만세.

 

 

1919년 4월 13일임시 의정원의장 이동녕과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의 이름으로 선포된 상해 임시정부 의원내각제 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 이었다.그후 서울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집정관 총재로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혼돈이 생겼다. 안창호가 미국에서 상해에 도착, 러시아령 정부와 함께3개 임시정부를 통합하고 상해 임정헌법 제1차 개헌을 통하여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로 하는 정부를 9월11일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런 축하의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그 당시의 민주화 열기를 알 수 있다.

 

광복이 되자 이런 노래도 나왔다.

 

따다따 따다따 나팔 소리 들린다 / 쿵 쿵 쿵 북소리 들린다 / 남대문을 열어라 동대문을 열어라 / 임시정부들어온다 광복군이 들어온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들어오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해체되고 정부 요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왔다. 이승만은 국부로 떠받드는 국민의 지지와 미국과의 연계를 맺으며 정부를 수립,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은 통합 임정의 대통령이었으나 그의 독단독선적인 성격에다 그가조직한 구미위원부의 권한 문제와 공채 발행 문제로1925년 「탄핵결의」 를받았다. 그리고 임정은 제2차 개헌을 통해 완전한 내각책임제로 바꿨다. 이승만의 「임정」 계승은 말 뿐이었다. 4·19 민주 학생혁명으로 이승만 권위주의 체제는 무너졌다. 여기서 우리는 정부의 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우리는 임정을 「제1민주정부」 로명명하여 「제1공화국」 과혼동을 피하고 「제1공화국」 은 이승만 정부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들리고 남대문도 동대문도 열었지만 광복군은 들어오지 못했다. 그리고 국군의 주류는 일군(日軍) 만군(滿軍) 출신으로 형성되었다. 비대해진 군은 정치에 나섰다. 5·16쿠데타에 성공하고 정권을 잡았다.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 권위주의 체제는 또 군 출신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장기집권과 독재정치를 한 정부를 민주공화국이라고 할 수없다. 이제 4·19 후의 민주당 정부를 「제2」, 시민혁명적 6월 항쟁을 통해 국민의 손으로 이룩한 현 정부를 「제3민주정부」 라고 정리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민족사관은 있어도 이러한 민주사관은없다. 헌법의 전문대로 「3·1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 하는 민주정치사의 맥을 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임정을 「제1민주정부」 로 명확히 함으로써 민주화는 굳게 다져진다고 본다.

 

 

臨政은 「제1 민주정부」

임시정부 수립 75주년에 부쳐

民主史觀 정립‥‥「정부의 脈」 정리 필요

 

李達淳

 

1994.04.12.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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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신문은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개혁 진형 신문으로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 1879년 창간된 이래 1920년대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이끌며 보통선거권과 여권 신장, 군비 증강 반대를 사시로 지지했으며, 이는 1936년 황도파 장교단에 의해 신문사 습격 사건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아사히신문 또한 1940년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며 대본영의 어용지로 전락한 어두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마치 1970년대~1980년대 군부 독재를 거치며 보도지침에 의거해 대통령의 정책에 거수기로 찬동을 표명하는 기사를 낸 한국 신문의 역사를 앞서 밟은 것이다.

 

 

그러한 아사히신문은 1945년 패전 이후 <스스로를 벌하는 말씀>을 통해 국민의 여론과 민의에 관계하는 언론사로서 전쟁 부역에 따른 참혹한 결과를 이끌어 낸 것에 대한 책임을 시인했으며, 동년 10월 24일에는 기존 임원진의 전원 사퇴와 사내 종업원 대의기구의 설치, 그리고 신문사 차원의 선언을 통해 민주주의 일본 건설에 대한 지지와 전쟁 옹호에 대한 사과문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아사히신문은 오늘날 일본 제2의 신문으로 사회적 소수자와 민권 세력의 입장을 꾸준히 대변하고 있다.

 

한국의 신문은 3.1운동 이후 문화통치에 따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된 이래 100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양 신문사가 독립운동과 반탁운동, 민주화운동, 문화 사업에 이르기까지 각 방면에 깊숙히 관계하며 오늘날의 한국을 만든 것에 대한 공은 인정해야겠으나 그와 마찬가지로 일제에 대한 적극적인 부역과 사주 일가의 신문 사유화, 독재정권 비호, 자본 및 권력과의 결탁은 한국 언론사의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양 신문사의 사가에는 '3.1운동 정신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창간 100주년을 맞아 양 신문사는 저마다 특집 기획 보도를 연달아 내고 과거 100년의 역사를 자축하고 있다. 그러나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선언한 지 101년, 새로운 2세기를 맞이함에 있어서 한국판 <스스로를 벌하는 말씀>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도 과도한 욕심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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