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언론계와 학계를 중심으로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과거 3.1운동에 대한 인식이 '전민족적인 항쟁'이라는 독립운동의 범위 내에 한정돼 있었던 것에 비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새롭게 조명된 3.1운동에 대한 접근법은 '민주공화국의 출발'이라는 민주사적 관점에서의 해석이 보편화되었다는 데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임시정부 또한 대한민국 공화국 건국사의 시원으로서, 국민주권의 상징으로 국민들의 가슴 속에 새롭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헌법 전문의 3.1운동과 임시정부 법통 구절이 많은 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게 되고, 이것이 학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널리 인정받게 된 것은 전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이 크게 확대된 것과는 달리, 3.1운동에 대해서는 여전히 '대규모 독립운동' 정도로 가볍게 여겨지는 경향이 남아있는 듯 하다. 한국 역사학계를 혼란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건국절 논쟁' 또한 그 반대론에 대한 역사적, 법률적 근거를 헌법 전문의 '임정 법통'에서 주로 찾았을 뿐, 임정을 낳은 3.1운동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삼일절 축사에서처럼, 임정 법통의 구절은 그 앞의 3.1운동이 전제되지 않으면 역사성과 법적 정통성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때문에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해 논할 때, 3.1운동의 전개와 의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할 수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3.1운동은 실패한 운동이 아닌, 대한민국의 건국을 잉태한 '성공한 혁명'으로 봐야 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 째로 3.1운동의 원 목적이 즉각적인 독립 쟁취에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우리는 3.1운동을 통해 즉각적인 독립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3.1운동의 의미에 대해서는 숭고하다는 평가를 내리면서도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운동의 진압'이라는 결과만을 추종하여 '실패한 것'으로 평가절하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우리는"역사학자들은 성공숭배자들이어서, 당장에라도 소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곧장 실패로 간주한다"는 쉴레진저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역사학자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역사학에는 '지체된 성공'(Delayed Achievement)라는 개념이 있다. 당장에는 목적 달성에 실패한 듯 보여도, 그것이 연이은 사건에 영향을 주어 결과적으로 그 소기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장기적으로 영향을 준 사건에 대해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3.1운동이 바로 그러한 '지체된 성공'에 속한다. 우선 3.1운동의 목적부터가 그러했다. 33인 지도자 손병희 선생은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겠다"며 3.1운동 직전 천도교 간부들에게 말한 바 있다. 즉, 3.1운동은 독립국 건설을 위한 첫걸음이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그리고 우리 민족은 손병희 선생의 말씀대로, 독립정신을 간직한 끝에 8.15 해방과 3.1정신에 따른 정부 수립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다. 3.1운동이 성공한 첫 번째 이유다.

 

둘 째로 3.1운동의 결과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데 있다. 3.1운동은 그 초기부터 독립 건국을 주도할 민주공화제의 임시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이는 조선독립신문 및 각 지역의 전단에서도 드러난다. 3.1운동의 영향으로 발족한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선포하고 5천년 역사상 최초로 삼권분립의 민주공화제를 천명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왕정 복고는 완전히 타도되고 민주공화국 건설이 한국 독립의 최고 당위로 설정되었다. 한국 민주 헌정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할이 과소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이고, 임시정부 또한 3.1운동 없이는 그 의미를 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소수 친일 반동 분자와 극단주의적인 공산 좌파 세력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독립운동가들과 민중들이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정신을 숭상하고, 이 운동의 정신에 입각해 독립국을 세우는 데 압도적으로 찬동을 표했다는 데 있다. 역사적 사건은 후대 사람들의 의미 부여와 기억 활동을 통해 그 정체성에 활력이 불어넣어지고, 이를 통해 과거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돼 미래로의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된다. 대한민국 건국으로의 길잡이가 바로 3.1운동이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3.1절을 겨레의 명절로 성대하게 축하했다는 사실과 공산 좌파 진영에서조차 3.1절에 맞추어 인민정부 수립을 선포할 계획을 마련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1948년 제헌 국회 선거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이 나라의 정통성을 3.1운동의 독립선언에서 찾아야 한다는 데 동의를 표하고, 3.1정신을 건국정신으로 천명한 대한민국 헌법을 우리 국민이 또한 승인했다는 데 있다. 국민의 기억과 지지 속에 국가의 출발로서 공인받게 된 3.1운동, 그 의미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8.15 광복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분명 자랑스러운 역사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광복이 3.1운동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8.15 광복은 3.1운동에 따라오는 것이다. 3.1운동이 있음으로 해서 8.15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고, 8.15 광복이 있음으로 해서 3.1운동은 성공의 영역에로 들어올 수 있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광복 75주년을 목전에 둔 우리들은, 광복의 감격을 있게 해준 3.1운동의 위대한 역사적 의의에 경의와 축복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3.1절을 겨레의 대축제일로 맞이하는 것으로 현시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Posted by 일간묘보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오늘날 세계적인 빈곤국이자 독재국가로 악명 높은 베네수엘라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남미의 대표적인 부국이었다. 정치적으로는 1958년 푼토 피호 협정 이래 대의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정착했고, 석유 수출을 바탕으로 국민 소득 수준 또한 높은 축에 속했다. 당시 베네수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약 1만 불 가량으로, 같은 시기 한국은 1천 불 달성조차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베네수엘라는 당시 세계 경제 순위 20위권에 들어가는 경제대국으로, 석유 판매를 통해 얻는 국고 수입과 안정된 정치를 바탕으로 세계의 모범 국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1980년대 저유가 시대에 접어들면서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출액이 크게 감소하였고, 이는 국고 수입에 큰 타격을 입혔다. 베네수엘라는 1989년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당시 대통령 페레스는 금융 지원을 조건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수용하게 된다. 주요 공기업이 민영화되었고, 경쟁력을 명분으로 공공 서비스의 가격을 크게 인상했다. 특히 버스 요금이 하루 아침에 2배로 오를 정도로 신자유주의 경제제도의 폐해는 심각했다. 참다 못한 수도 카라카스의 시민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낳은 경제파탄에 분노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나, 군을 동원한 페레스의 강경 진압으로 수천 명이 죽고 다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현대 베네수엘라의 역사를 뒤바꾼 '카라카소 사건'이다.

 

 

 

 

이 사건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반기를 든 민중운동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좌익 포퓰리즘이 득세하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훗날 혁명의 지도자이자 반미운동의 선봉이 되는 우고 차베스는 군 복무 당시 발생한 카라카소 사건을 계기로 페레스 정권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실패함으로써 일약 전국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199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2002년 보수 우익 진영에 대한 차베스 탄핵 시도가 민중파업으로 무산된 이후 온건 진보에서 급진 좌파 포퓰리즘으로 정책 노선을 선회함으로써 베네수엘라를 대표적인 좌파 국가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그의 집권 기간 동안 언론의 자유와 사법권의 독립이 심각하게 침해당했고, 경제정책 또한 안정된 산업 기반 구축 없이 석유 의존 일변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21세기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내건 차베스는 복지정책을 실시해 빈곤율을 낮추는 등 여러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경제와 정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 없이 대중인기영합주의로 스스로의 권력을 확대하는 데 골몰해 오늘날 정치경제적인 혼란을 낳은 한 주범이 되었다. 현실적인 정책 모색과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이 없는 차베스의 좌파 포퓰리즘은 베네수엘라를 세계 최악의 빈국으로 전락시켰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과 부동산 투기 억제 정책에 대한 일부 강남 기득권층의 반발이 거세다. 이들은 국민의 전반적인 소득의 질을 향상시켜 소비와 저축의 선순환을 이끌어내는 소득주도성장에 반대하며 종래의 낙수효과를 주장하고, 부동산 투기에 혈안이 되어 건전한 조세 납부와 무노동 이윤에 대한 사회적 균점을 거부하며 "나라가 니꺼냐"라는 격한 구호로 정부에 경제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의 양극화는 사회갈등을 심화해 왔으며, 그 극에 속한 빈민들이 다수가 되었을 때 민란으로 국가나 정부가 전복되고 혁명의 광기가 몰아쳤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익히 배워왔다. 현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과 부동산 조치는 부의 양극화를 억제함으로써 언젠가 일어날 지도 모르는 민중의 반란과 좌파 포퓰리즘의 득세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만일 강남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부동산을 바탕으로 사회적 계급을 형성해 양극화 속에서의 이익 독점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면, 그리하여 부익부 빈익빈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까지 다다르게 된다면, 이들은 베네수엘라처럼 이 나라를 좌파 포퓰리즘의 광기로 몰아넣을 정치인의 등장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는 꼴이 될 것이다.

 

Posted by 일간묘보

댓글을 달아 주세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는 임정의 대표적인 좌파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18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고, 연해주의 알렉산드리아 김에 이은 두 번째 한인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임시정부가 조직된 이후 이동휘는 소련과 연계해 공산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확장하려 했고, 레닌이 이끌던 코민테른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독립운동에 활용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당시 한인 공산주의 단체의 분파는 러시아 이르쿠츠크의 <전러한인공산당>과 임시정부 이동휘 계열 <한인사회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인사회당이 코민테른에 가입을 선언하고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이르쿠츠크에 대표단 박진순을 파견했을 때, 전러한인공산당이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워 한인사회당의 자금을 탈취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한인 좌파 독립운동계의 분열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그 악명 높은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이다. 당시 총리 이동휘는 "공산주의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코민테른에 서한을 보내 한국 유일의 사회주의 정당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성립된 한인사회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해 소련 레닌에게서 금화 200만 루블을 지원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한형권과 김립이 레닌의 자금 중 일부를 한인사회당의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해버린 것이다. 임시정부로 와야 할 자금이 이동휘의 정당 활동에 유용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임정 내에서 이들에 대한 성토가 터져 나왔다. 예관 신규식, 이동녕 등 여러 임정 지도자들은 이들의 행위를 '죽어 마땅한 처사'로 비판했고, 그 결과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하고 만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두고 발생한 두 사태는 임정의 대외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좌우대립은 임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어 사실상 '종이 정부'의 위치로까지 추락시켰다. 임시정부가 다시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기구로 그 명맥을 회복한 것은 백범 김구가 영수로 추대되고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익 계열이 임시의정원에 합류한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최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기림 사업을 전개해 온 정의기억연대의 부실 회계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민족의 비극이라는 금기를 내세워 기부금 사용을 투명하지 않게 처리했다는 점, 그리고 위안부 피해자들을 대표하는 조직임을 내세우며 독단적인 행보를 펼친 윤미향 씨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많은 사람에게 당혹감을 안겨다주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세계에 알리며 역사의 비극을 후대에 전승하고 세계인의 동참을 이끌어내는 데 정의연이 적극적으로 활동해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과 교육, 인권 증진 사업에 사용돼야 할 기부금이 정의연 회장 윤미향 씨에 의해 불투명하게 사용된 것은 민족 독립이란 대의를 위해 쓰여야 할 독립 자금을 한인사회당이 독단적으로 사용처를 결정한 100여 년 전 모습을 연상케 한다. 정의기억연대는 기부금 사용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윤미향 1인 운영 체제의 폐쇄적 조직 체계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개방된 위안부 단체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한인사회당의 불투명한 자금 사용 논란이 임시정부를 위기에 몰아넣고, 급기야 독립운동세력의 몰락에 준하는 사태를 불러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Posted by 일간묘보

댓글을 달아 주세요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제국 사이의 전쟁을 다룬 영화 「300」(2007)이 한때 이란에서 큰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고대 대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의 샤 크세르크세스를 「미개하고 잔인무도한 폭왕」으로 묘사했다는 것이 그 사유였다. 영화에 묘사된 크세르크세스는 마치 원시부족을 연상하듯 온 몸과 얼굴을 금속 피어싱으로 치장한 채 어떠한 바지와 갑옷도 입지 않은 「나체」의 상태로 극에 등장한다. 그의 지휘를 따르는 페르시아군은 검은 피부를 하고 있으며, 그 병사들의 신체도 스파르타군에 비해 왜소한 모습으로 영화에 비춰졌다. 이란인들은 300이 묘사하는 페르시아 제국의 모습이 「역사왜곡」임을 주장하며 감독인 잭 스나이더와 배급사 워너브라더스 사에 항의 메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실제 역사 기록에서 크세르크세스는 검고 긴 머리와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남아있는 조각과 회화에서는 긴 실크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당시 페르시아군은 소수 정예로 선발된 귀족 자제로 구성돼 있었으며, 그렇기에 왜소하고 나약한 병사라는 극의 설정은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페르시아인은 백인 계통으로 오늘날 페르시아의 국호인 「이란」은 백인 민족 「아리아인의 땅」에서 유래한 이름이기까지 하다. 즉, 검은 피부의 페르시아군은 고증에 맞지 않은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체에 금제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망토만을 두른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모습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동방 대제국의 황제를 「혐오감이 느껴지는 미개한 추장」 수준으로 격하하기에도 충분했다. 동방을 「미개하고 후진적인 사람이 사는 곳」으로 묘사한 것이다.

 

동방에 대한 서구의 편견과 왜곡된 인식은 고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인의 뇌리와 문화에 스며들어 소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동방관(東方観)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야만인을 의미하는 영단어 「바바리안」이 고대 그리스에서 그리스어를 쓰지 않는 동방인을 차별하며 부르던 단어 「바르바보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나, 소설 <정글북>을 쓴 작가 키플링이 「백인의 의무」란 시를 통해 동양인을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아이」로 폄하했다는 사실은 서구인이 동양인을 바라보는 인식이 어떠한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동양 다수의 국가가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독립 이후에도 많은 동양 나라가 독재와 빈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서양이 바라보는 동양은 미개하고, 후진적이며, 어리석은 이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볍게 여겨지기 일쑤였다.

최근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수십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의료 시스템이 붕괴된 가운데, 한국의 독보적인 코로나 방역 대책은 서구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한 언론인이 한국을 「자유와 인권이 없는 나라」라며 폄하하는 기고문을 낸 것이나, 네덜란드의 한 방송이 한국의 방역 성공의 이유를 「독재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설한 것은 동양 국가에 대한 서양인의 대(対)동양 인식이 얼마나 편협하고 왜곡돼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동양은 언제나 비민주적이고, 인권이 억압당하며, 과거 역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전체주의 국가들의 집합체라는 오만함과 편견. 그런 저들에게 동양의 '진짜 역사'를 알려준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미국에서 1883년에 가서야 도입한 공무원 임용 시험 제도를 10세기 이전부터 도입한 중국과 조선, 1970년대까지 「단종법」으로 장애인에 대해 강제 불임수술을 하던 서구와는 달리 맹인, 간질 환자, 척추 환자가 재상까지 역임할 수 있었던 조선, 선진 무기기술을 바탕으로 동방의 은둔왕국을 침략한 프랑스의 병사가 조선에 대해 「어느 집을 가든 책이 있는 부러운 나라」라며 자국 국민의 무지함을 한탄한 일기 등. 동양과 서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Posted by 일간묘보

댓글을 달아 주세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윌리엄 베버리지라는 이름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한 명이 전시내각을 이끌던 처칠 수상 앞으로 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의 제목은 <사회보험과 관련 서비스>. 영국노동조합총연맹의 건의로 만들어진 이 보고서는 결핍, 질병, 무지, 불결, 나태함을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5대 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퇴치하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해야 함을 주요 가치로 내걸었다. 이 보고서는 발행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전 국민의 95% 이상이 그 내용을 접하게 될 정도로 큰 명성을 얻었으며, 당시 수상이던 처칠은 연설을 통해 전쟁 후 새로 수립되는 정부에서 베버리지 보고서에 입각한, '요람부터 무덤까지 아우르는 복지 정책을 실현'할 것을 천명했다. 베버리지 보고서의 노선에 따라, 처칠 재임 중 학교 급식과 공공 주택 보급 사업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고, 처칠의 뒤를 이은 노동당의 애틀리 내각은 가족수당제도와 국영보험제도, 토지 임대 통제법 등 여러 사회보장제도를 입안해 영국을 유럽의 대표적인 복지 강국으로 탈바꿈시켰다. 오늘날 영국이 자랑하는 국영의료보험 NHS는 이 시기에 확립된 것이다.

 

마가렛 대처 이후 영국의 복지체제는 과거보다 그 명성이 많이 바라긴 했지만, 오늘날 영국 복지사회의 발전 과정에는 보수주의 정당인 <영국 보수당>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19세기 중후반 보수당 소속 수상이었던 디즈레일리는 노동자 주거 개선법, 공중보건법 등을 제정해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 앞장섰으며, 1867년에는 선거법 개정을 통해 다수 도시 근로자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했다. 2차 대전 이후 집권한 맥밀런 수상은 고아 연금과 노령 연금 지급을 확대했고, 주당 근로시간을 48시간에서 42시간으로 축소하는 등 전후 영국의 부흥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대처의 신자유주의 이전까지, 영국 보수당은 영국을 유럽의 대표적인 사회 강국으로 이끈 수권 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보수(保守)란 오래된 것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철학으로써의 보수주의는 '수구'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정치철학에서의 보수주의는 전통과 관습을 지지하되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사회를 완전체에 가깝게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는 역사 속에서 형성된 구체적인 제도와 관습을 유지하되, 자유로운 민주사회를 향해 점진적인 개혁을 하는 것을 보수주의의 가치로 내건 바 있다. 보수주의의 원래 가치는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발전해 나가는 점진적인 변혁 과정을 지지하는 것이다.

 

최근 미래통합당의 내분이 심상치 않다. 기존의 아스팔트 우파 - 수구주의에서 탈피해 보수주의의 새로운 가치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보수주의를 내거는 이들의 주장도 가만 살펴보면 사회복지나 부의 재분배에 대해선 부정적인 시각이 다분하다. 헌법의 임정 법통이나 남북평화통일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견해를 비춘다. 통합당이 당사에 초상화까지 걸어가며 당의 원류로 존경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의료보험제도와 토지공개념 제도의 도입을 논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바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의료보험을 전 국민에게로 확대하고 영구임대주택사업을 실시하는가 하면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방 정책을 실시해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시정부를 대한민국의 법통으로 선언하고 영화와 음악에 대한 사전심의제를 폐지하는 등 개방된 문화산업의 문을 열었다. 통합당이 보수주의의 가치를 내세운다면, 한국판 처칠, 맥밀런, 디즈레일리를 찾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Posted by 일간묘보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필자의 고향은 부산이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어른들은 투표장에만 갔다 하면 한나라당을 찍었고, 민주당을 향해선 '전라도당', '빨갱이'라는 험한 말을 입방아에 오르내리곤 했다. 민주당계 정당은 부산에서는 30% 정도 득표하면 선방한 것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험지 그 자체였는데, 소위 낙동강 벨트라 불리는 북강서을 선거구에 출마한 노무현 전 대통령도 '보수 도시' 부산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 역사가 있다.

그러나 부산의 선거史를 돌이켜 본다면 부산이 '보수 도시'라는 이미지가 생긴 것은 근 3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1990년 삼당 합당 이전까지만 해도 총선거가 열리면 부산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이 언제나 신승을 거두었다. 특히 중선거구제하에서 선거가 치러진 1985년에는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이 호남 지역에서조차 스무 석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는 단 세 석밖에 얻지 못하는 참패를 겪어야만 했다. 민주화 이후인 1988년 총선거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전체 15석의 의석 가운데 14석을 민주당이 싹쓸이할 정도로 부산은 민주당 계열에 우호적인 도시였다. 사실 그 이전부터 부산은 4.19 의거, 부마항쟁, 6월 민주항쟁 등 민주화운동에 있어 선두에 섰던 대표적인 야도(野都) 중 하나였다. 결국, 부산이 오늘날과 같은 보수의 도시가 된 것은 삼당 야합이 초래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16년 총선거는 보수화된 부산의 정치 지형을 뒤흔든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부산에서 민주당 후보가 다섯 명이나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부산의 민심이 더이상 한나라당계 정당에 압도적인 표를 주지 않으며, TK와 같은 '텃밭'에서 '캐스팅 보트'라는 새로운 승부 지역으로 거듭나게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과거 민주당계 정당이 부산에서 얻은 득표율은 낮게는 20%대에서 평균 30%대의 벽을 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부산에서의 민주당 의원의 당선은 '보수 도시' 부산의 시대도 어느덧 종말을 고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이번 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부산은 민주당에 단 세 석의 의석만을 안겨주었다. 다섯 명의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 배출된 20대 총선과 비교하면 오히려 '퇴보'한 면도 없지 않아 있어 보인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약간 다르다. 비록 의석수가 줄긴 했어도, 여전히 민주당 후보가 부산에서 여럿 당선됐다는 점은 부산에서도 민주당이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대표적인 증거기 때문이다. 더욱이 민주당 후보가 낙선한 다수의 지역구에서조차 평균 40%대 이상의 표를 얻은 것은 민주개혁진영에 대한 부산 시민의 열망이 나날이 커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번 선거를 '부산의 재보수화'로 단정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부산 지역에서 패배한 데에는 가덕도 신공항과 같은 부산 지역 주요 경제 현안에 대해 민주당 정부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한 대형 상권 지역의 경기 침체가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 말하면 민주당 정권이 부산에 그만큼 공을 들인다면 민심이 다시 민주당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군사정권 시기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야도 부산'의 저력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 저력을 키워 부산을 새로운 민주개혁진영의 선봉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민주당에 달려 있다.

 

Posted by 일간묘보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어느 방송사도 중계하지 않은 씁쓸한 분위기 속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기념식과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기공식이 서대문독립공원에서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에게 '자유와 평등', '화합과 단결', 그리고 '인류애'를 가져다 주었으며, 친일이 아닌 독립운동이 대한민국 역사의 주류였음을 모두가 알 수 있게 할 것임을 선언했다.

 

문 대통령의 축사에서처럼, 임시정부는 반일독립을 넘어 자유평등, 총화단결, 인류공영의 가치를 추구한 민주공화국의 뿌리이자 법통이었다. 임시정부에 의해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대내외에 천명된 지 어느새 101년, 독립과 산업화, 민주화의 100년사를 마감하고 이제 새로운 조국의 2세기로 나가는 도상에서, 우리는 새 시대를 개척할 첫걸음으로 총선거를 하게 된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임시정부의 정신과 가치는 단순히 독립건국이 제일(第一)의 과제였던 대일항쟁기를 넘어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사료된다. 임시정부의 국시였던 삼균주의는 개인과 개인의 평등, 민족과 민족의 평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추구하며 세계 여러 나라가 함께 어울려 사는 '세계일가'(世界一家)를 지향했다. 참정권을 폭넓게 보장하여 정치적으로 균등을 실현하고,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의 통제, 중소산업의 민영화로 경제적 기회의 균등을 이루고, 국비 교육을 통해 누구나가 배움으로써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다. 코로나19로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고, 신자유주의의 광란 속에 인간의 존엄이 짓밟히고 부(富)에 따른 신 계급제가 등장한 오늘날의 사회에서, 임정 선열들이 내세운 인류공생의 가치와 만민평등의 정신은 더욱 절실한 '오래된 미래'다.

 

 

친일이 아닌 독립운동이 대한민국의 주류라는 구절은 새 시대의 국회가 받들어야 할 국가의 정체성을 넌지시 던져주고 있다. 지난 건국 101년의 역사는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헌법과 정부를 수립하고, 국민의 역량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빛의 역사였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이다. 독립운동의 정신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 헌법은 반민특위의 해체와 부일배(附日輩)의 집권으로 더럽혀졌고, 군사독재 하에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은 억압받았으며, 신자유주의의 도입으로 빈부격차는 날로 심각해지고 청년은 절망과 무의욕 속에 경제 계급제에 물들어갔다. 임시정부가 지향했던 가치와는 정반대로 나갔던 지난 날의 모습은 국가정체성의 위기 그 자체였다. 이번 총선거가 국체(国体) 수호의 선거인 이유다.

 

이번 총선거는 임시정부가 그린 대한민국의 미래상을 구현할 일꾼을 선출하는 축제의 장이어야 한다. 독립운동가들이 제시한 자유평등과 평화번영이라는 국체의 가치를 수호할 것인가, 아니면 친일·군사독재 세력의 반국가(反国家) 이념을 확산시키고 조국의 뿌리를 뒤엎을 것인가. 코로나19 속 흔들림 없는 방역과 민주주의의 수호로 세계를 이끄는 선두가 된 대한민국이 나갈 길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현명한 애국 국민들은 정로(正路)를 알고 있을 것이다. 

 

 

 

Posted by 일간묘보

댓글을 달아 주세요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1주년 되는 날이었다. 봄바람이 이는 춘4월 아침, 코로나19로 인해 예년과는 달리 소수의 인원만이 참석한 가운데 서대문독립공원에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친일이 아닌 독립운동이 역사의 주역"임을 강조하였고, 임시정부 기념관 설립의 당위는 임정 독립운동가들이 지향한 '자유 평등', '통합', 그리고 '인류애'의 가치를 후대에 널리 알리기 위함임을 선언했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오늘날 사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던져주었다. 그의 말대로, 임시정부의 목적은 단순히 반일 독립이 아니었다. 인간의 존엄을 본질로 하는 자유와 평등, 성별, 나이, 빈부, 지역을 넘어선 국민의 화합과 통합, 인류 문명에 공헌하는 인류애의 회복, 그것이 바로 임시정부가 지닌 역사적 의의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제를 천명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시작이다. 3.1운동의 민의를 받들어 임시정부를 수립한 애국지사들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선포하고 삼권분립의 민주공화국을 건설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 임정은 여러 고난 속에서도 임시헌법과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따른 정당 정치를 수행했고, 이는 우리 민주주의의 큰 자산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헌장과 강령은 1948년 제헌 헌법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오늘날 민주 헌정의 기원이 되었다. 헌법 전문의 3.1운동과 임시정부 법통은 민족사관을 넘어 민주사관까지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임정의 의의는 독립과 정부수립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은 <3.1혁명 정신 해석>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3.1운동의 핵심 정신을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는 한민족의 독립과 전 인류의 공동생존을 위한"자존과 공존"이요, 둘째는 계급과 당파를 넘어선 "민주와 단결"이요, 셋째는 권세에 굴하지 않고 가난에 무너지지 않는 "기개와 도의"며, 넷째는 대단결을 위한 "자신감"이었다. 김구 선생이 말씀하신 3.1운동의 정신은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이기도 했다. 임정의 국시였던 삼균주의는 최종 목표를 세계 여러 민족이 함께 사는 "세계일가"였으며, 정치적 기회의 평등과 개인과 개인 간의 차별 폐지를 주장했다.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누구나가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세상 또한 임시정부가 그리는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공정하고 자유롭고 정의로운 세상, 세계 인류와 더불어 사는 세상,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목적은 실로 이것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단순한 과거의 역사가 아니다. 임정의 역사는 자유와 민권, 평화를 위한 겨레의 역사요, 즉, 대한민국이 나갈 방향을 제시하는 길잡이다. 인류의 역사가 자유와 인권의 확대라는 진보의 역사인 이상, 우리나라의 최종 목표가 남북이 하나 되는 진정한 통일민주공화국의 건설인 이상, 임시정부는 이전부터 그래왔고 오늘날에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만대에 지속될 조국의 오래된 미래다.

 

 

Posted by 일간묘보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