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와 페르시아 제국 사이의 전쟁을 다룬 영화 「300」(2007)이 한때 이란에서 큰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고대 대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의 샤 크세르크세스를 「미개하고 잔인무도한 폭왕」으로 묘사했다는 것이 그 사유였다. 영화에 묘사된 크세르크세스는 마치 원시부족을 연상하듯 온 몸과 얼굴을 금속 피어싱으로 치장한 채 어떠한 바지와 갑옷도 입지 않은 「나체」의 상태로 극에 등장한다. 그의 지휘를 따르는 페르시아군은 검은 피부를 하고 있으며, 그 병사들의 신체도 스파르타군에 비해 왜소한 모습으로 영화에 비춰졌다. 이란인들은 300이 묘사하는 페르시아 제국의 모습이 「역사왜곡」임을 주장하며 감독인 잭 스나이더와 배급사 워너브라더스 사에 항의 메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실제 역사 기록에서 크세르크세스는 검고 긴 머리와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남아있는 조각과 회화에서는 긴 실크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당시 페르시아군은 소수 정예로 선발된 귀족 자제로 구성돼 있었으며, 그렇기에 왜소하고 나약한 병사라는 극의 설정은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페르시아인은 백인 계통으로 오늘날 페르시아의 국호인 「이란」은 백인 민족 「아리아인의 땅」에서 유래한 이름이기까지 하다. 즉, 검은 피부의 페르시아군은 고증에 맞지 않은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나체에 금제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망토만을 두른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모습은 오랜 역사를 지닌 동방 대제국의 황제를 「혐오감이 느껴지는 미개한 추장」 수준으로 격하하기에도 충분했다. 동방을 「미개하고 후진적인 사람이 사는 곳」으로 묘사한 것이다.

 

동방에 대한 서구의 편견과 왜곡된 인식은 고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인의 뇌리와 문화에 스며들어 소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동방관(東方観)을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야만인을 의미하는 영단어 「바바리안」이 고대 그리스에서 그리스어를 쓰지 않는 동방인을 차별하며 부르던 단어 「바르바보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나, 소설 <정글북>을 쓴 작가 키플링이 「백인의 의무」란 시를 통해 동양인을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아이」로 폄하했다는 사실은 서구인이 동양인을 바라보는 인식이 어떠한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동양 다수의 국가가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독립 이후에도 많은 동양 나라가 독재와 빈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더욱 공고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서양이 바라보는 동양은 미개하고, 후진적이며, 어리석은 이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볍게 여겨지기 일쑤였다.

최근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미국과 서유럽을 중심으로 수십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의료 시스템이 붕괴된 가운데, 한국의 독보적인 코로나 방역 대책은 서구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한 언론인이 한국을 「자유와 인권이 없는 나라」라며 폄하하는 기고문을 낸 것이나, 네덜란드의 한 방송이 한국의 방역 성공의 이유를 「독재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설한 것은 동양 국가에 대한 서양인의 대(対)동양 인식이 얼마나 편협하고 왜곡돼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동양은 언제나 비민주적이고, 인권이 억압당하며, 과거 역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전체주의 국가들의 집합체라는 오만함과 편견. 그런 저들에게 동양의 '진짜 역사'를 알려준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미국에서 1883년에 가서야 도입한 공무원 임용 시험 제도를 10세기 이전부터 도입한 중국과 조선, 1970년대까지 「단종법」으로 장애인에 대해 강제 불임수술을 하던 서구와는 달리 맹인, 간질 환자, 척추 환자가 재상까지 역임할 수 있었던 조선, 선진 무기기술을 바탕으로 동방의 은둔왕국을 침략한 프랑스의 병사가 조선에 대해 「어느 집을 가든 책이 있는 부러운 나라」라며 자국 국민의 무지함을 한탄한 일기 등. 동양과 서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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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심은 금물이건만, 결국 사달이 터지고야 말았다. 코로나19 자가격리 대상자인 이들이 당국의 지시를 무시한 채 무단 외출을 감행한 것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집단 감염의 가능성을 낮추려 관민 모두가 노력하는 와중에, 일순간의 쾌락을 위한 일탈로 탄탄한 국가 방역망에 흠집을 내려 한 것이다. 악의적이었건 아니었건, 사회 안전을 해치려 한 시도에 대한 시민의 분노는 하늘을 치솟고 있다.

정부 또한 발 빠른 대처에 나섰다. 자가격리 대상자가 당국의 지시를 무시한 채 무단 외출을 할 경우 최대 징역 1년, 또는 1천만 원 미만의 벌금형이라는 엄형에 처하고, 오는 5월경으로 예정된 재난기본소득 또한 지급되지 않을 것이라 밝혔다. 자가격리 앱을 켜둔 채 외출하는 '꼼수'를 차단하고자 무작위 현장 점검 또한 확대될 예정이다. 정부의 이러한 대처에는 당장의 욕구 충만을 위한 '작은 자유'로 인해 코로나19의 성공적인 방역과 안정된 사회에서의 정상적인 삶으로의 복귀라는 국민의 '큰 자유'가 침해당하는 것을 공공선의 차원에서 묵과할 수 없다는 배경 인식이 기저하고 있다.

자유의 사전적 정의는 외부의 구속이나 압력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외부의 구속과 압력을 오늘날 국가공동체에서 찾자면 정부 행정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이런 정부 행정력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작은 자유', 또는 '소극적 자유'에 속한다.

그러나 사전에 언급된 자유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남에게 구속당하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같다. 다만 전제 조건으로 '법률의 범위 한도 내에서'가 붙는다. 법률은 국민이 자신이 속한 국민공동체를 유지, 통합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합의를 통해 만든 공공 계약이다. 이 계약은 국민의 삶을 옥죄는 측면도 있으나, 그 옥죔은 개개인이 속한 공동체의 안녕과 고른 행복추구권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구속력과는 차이를 지닌다.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이 말한 "꽃을 꺾을 자유가 아닌 공원에 꽃을 심을 자유"는 공공의 행복과 국가공동체의 수호를 위한 자유, 즉, '큰 자유', '적극적 자유'에 해당한다.

최근 온라인상에서 일제강점기를 '축복'이라 찬미하며 제국주의를 미화하거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그리고 민주화운동을 통해 성립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부정, 폄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일관되게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자신의 반사회적, 반헌법적인 발언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개인의 인권과 존엄을 위해 헌법이 제공하는 작은 자유를 헌법 정신과 반국가세력, 반민주주의 세력에게까지 일괄적으로 부여함으로써 결국 공화국 체제 스스로를 붕괴의 길로 몰아넣은 바이마르와 나치의 사례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자가격리 수칙 위반이라는 '작은 자유'로 인해 방역 성공이라는 '큰 자유'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처럼, 민주공화국의 질서와 정체성 수호를 통한 정치적 평등이라는 '큰 자유'를 위해서는 헌법의 독립, 민주주의 정신을 부정, 폄하하고 반국체적인 발언을 할 '작은 자유'는 마땅히 제한돼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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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의 세계적 대유행에 따른 경제의 낙폭이 심각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코로나로 인해 중국의 산업 시설이 가동되지 않으면서, 지난 두 달간 소비와 제조업을 망라한 전체 산업 분야에서 최대 4~50%에 이르는 경기 쇠퇴를 목격해야 했다. 세계 주요 국가의 경제 성장률 또한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일각에서는 1929년 당시의 대공황과 준하거나, 이를 능가하는 경제 불황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의 쇠퇴와 이에 따른 대량 실직은 각국 정부로 하여금 소비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 부양 정책에 과감한 예산을 투자하게끔 하고 있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재난기본소득. 일정 소득 이하, 또는 전체 국민에게 재난 극복을 위한 소비 장려 차원에서 현금을 지원하는 재난기본소득제는 정부의 복지 확대를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며 폄하하던 미국에서조차 국가적 정책으로 논의될 정도로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은 오는 4월부터 연 소득 100만 불 미만의 국민 전체에 미화 1000불가량의 재난소득을 지원할 예정이다.

돌이켜 보건대, 1970년대 이후의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광풍 한가운데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큰 정부'와 '정부의 시장 영향력 확대'는 1970년대 이후 경기 침체의 요인으로 지목되었고, 이러한 주장을 펼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와 정치인이 구미 선진국의 정권을 획득하면서 '작은 정부, 큰 시장을 통한 효율적인 경제 성장'을 목표로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이 펼쳐졌다. 국영기업은 민간에 매각되었고, 국가가 책임지던 의료보험과 국민교육, 심지어는 국방산업조차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민영화되었다. 공공복리를 위해 존재하는 공기업이 경영 수지에 목을 매기 시작한 것도 이때 무렵부터이다. 이들은 비합리적인 국가 주도의 경제를 수익과 자율 위주의 민간 기업 위주 경제로 재편함으로써 모두가 경제성장의 수혜를 누릴 수 있다는 '낙수효과'를 제창했으나, 코로나 19의 대유행 속에서 시장은 민간이 요구하는 마스크와 의료 장비를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는 등 그 한계를 명명백백히 드러내고 말았다. 과거 시장의 원리를 강조하던 보수 언론과 정치인 무리가 오늘날 시장의 마스크 공급 실패 조치를 두고 '정부의 안일한 수급 정책'을 비판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후안무치.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경제 활성화를 위해 온 국민에게 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은 소수 급진파의 비현실적인 공상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코로나 19라는 세계적인 위기 사태는 경제 활성화를 위한 국가의 소득 분배의 필요성을 모두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쇠망의 조짐이 보이는 항공사 등 몇몇 사기업의 지분을 국가가 매입해 사실상의 재국유화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코로나 19가 불러온 경제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경제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관점에서이다. 세계적 대유행 속에서 퇴조하는 신자유주의의 열풍. 코로나 사태는, 코로나 이후 세계를 덮칠 '뉴 노멀'(새로운 표준)} 시대의 경제 정책에 범지구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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